고 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오랜 방황 속에 있는 나를 그녀는 안타까워했습니다.
향기 좋은 꽃이나 고운 엽서 한 장, 따뜻한 차 그런 것들로 그녀는 나의 문을 두드렸지만 닫혀진 문은 열릴 줄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지금의 나에겐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아."
내가 이렇게 잘라 말했을 때도 그녀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때 보다 좀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찾아와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청포'로 가는 시외 버스표가 들어있었습니다.
"고향엘 한번 다녀오세요."
"고향?"
느닷없는 고향이란 말이 설어 되물었습니다.
문득 그 동안 어쩌면 그녀도 그녀의 고향에 갔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마 표를 되돌려 줄 수 없어 마지못해 고향을 찾았습니다.
두어시간 시외버스를 타고 내려 또 다시 시내버스로 사십여 분.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구석구석 은밀하게 낯이 익은 마을 입구에 내려섰을 때 물결처럼 한꺼번에 매미 소리가 밀려 왔습니다.
매미는 나무 어디쯤 숨어서 이렇게 치열하게 울어대는 걸까하며 올려다보니 햇살에 부신 나뭇잎들이 수만 마리의 은빛 은어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과 원망 오로지 그뿐이던 가슴속으로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바람이 한 줄 스쳐 지났고 '휴~우'. 나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토해냈습니다.
'그래, 여기쯤이겠구나. 서울 가서 자리잡는 대로 데려가겠다던 아버지를 목마르게 기다렸던 곳. 지친 기다림을 물수제비로 뜨기도하고 징검다리를 아슬아슬 깨금발로 오가며 몸서리치는 지루함을 달래곤했던 곳이...."
잊고 있던 유년의 고향을 기웃거리는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징검돌 대신 놓여진
시멘트 다리 위에서 저들끼리 장난치던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으세요?"
"으응, 이름이 중하라고 아무 못나고 울기 잘하는 아이인데..."
"히히, 못나고 울기 잘하는 애는 저 애인데 이름은 틀리는데요."
아이들은 낄낄대며 조금 뒤쳐져 따라가는 한 아이를 가리켰습니다.
"쟤는요, 말도 잘 안하고 친구도 없는 외톨이에요."
"쟤네 집도 외톨이집이고요. 히힛."
본 마을과 좁은 산길로 드는 길목에 이르자 아이들은 아예 혀까지 내밀며 놀리고는
모두 마을쪽으로 내뺏고, 놀림당하던 아이 혼자 산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모습이 안돼보여 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 뒤를 따랐습니다.
발자국 소리에 돌아본 아이가 조그맣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이쪽은 다른 집은 없어요."
나는 대답대신 그 아이의 머리를 몇번이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이 놀리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니?"
"그 애들 말이 맞으니까요."
"형이나 아빠에게 일러주렴. 그 애들 아주 혼좀 나게."
이번에는 아이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한참 말이 없던 아이가 길 옆 이름 모를 산나무 열매를 채어 입에 넣으며 말했습니다.
"빨리 어른이 됐음 좋겠어요."
"어른이 되면 뭘하게?"
"아무도 놀리지 않을테니까요. 어디든 훨훨 떠나 버릴 수도 있고요."
"누가 놀리진 않는다 해도 어른이 되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단다. 지금의 나처럼 말야. 그리고 고향은 아주 떠나 버릴 수는 없는거고..."
머뭇거리는 아이의 가녀린 손가락 끝을 따라 초여름 햇살에 오두마니 드러나 앉은 아이의 외톨집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자, 이게 내 연락처다. 형이 필요하면 꼭 편지하렴."
"윤·중·하. 아...아니, 아저씨 이름이 중하예요? 아까 중하란 애를 찾는다고 했잖아요?"
"그래, 맞아. 그 못나고 울기 잘하던 애가 바로 나거든. 하하하."
오랜만의 내 웃음소리가 적막한 초여름 산을 흔들었습니다.
"얼굴이 밝아 보여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요?
나는 대답대신 그녀 옆에 앉아 주머니 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어 함께 읽었습니다.
".... 아저씨 아니 형님, 그날 읍내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사주고가신 동화책들 정말 고맙습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 모두 그러더군요. 슬픔을 참고 이기면 어른이 되는 거라고요. 그렇다면 난 자신 있어요.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참는 것만은 내 특기니까요. 하하. 참 그날 형도 많이 힘들고 슬퍼 보였는데 형은 어른이니까 더 잘 참고 이겨낼 수...."
다음엔 그녀와 함께 외톨집을 찾아가리란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편지를 읽던 그녀가 가만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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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역시 제가 책 어딘가에서 보고, 부지런히 타이핑을 쳤던 내용입니다. ^^
이 글은 어떤 동화작가께서 쓰신 글입니다. ^^
by 비를 사랑하는 소금인형
비 와 연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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